유배 가는 고려 국왕


충선왕은 나이 마흔 여섯 되던 해인 1320년에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티베트로 유배를 당했다. 당시 토번 또는 서번이라 불리던 티베트까지는 가는 데만도 무려 반년이나 걸렸다. 한 나라의 국왕이 1만 5000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 가는 심정이 얼마나 처참했을 것인가?


왜 충선왕은 이토록 먼 곳으로 유배를 가야 했을까? 충선왕의 유배지는 어디였고, 유배 생활은 어떠했을까? 고려 후기의 문신 익재 이제현은 티베트까지 직접 가서 충선왕을 만나고 돌아왔다. 

유배지는 티베트 어디였을까?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티베트의 상사결이라는 지역이다. 오늘날의 사캬지역으로 원나라 때 티베트의 종교 정치의 중심지였다.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이 바로 13세기에 지어진 800년 역사의 샤카사원이다. 충선왕은 사캬 사원에 머물렀다. 그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2년 반에 달한다. 이후 충선왕은 간쑤성의 도스마 지역으로 옮겼고, 도스마에서 7개월간 머무른 뒤 유배에서 풀려났다. 모두 3년 2개월에 걸친 유배 생활이었다.


원나라 황제의 외손자로 태어나...

왕의 신분으로 유배를 떠난 운명도 기구하지만, 충선왕은 그 출생 또한 평범하지 않았다. 

충선왕은 칭기스칸의 손자이자 원나라 5대 황제인 세조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충렬왕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의 국왕이 원나라 황제의 외손자가 되는 독특한 혈연에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 

몽골은 남송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밀고 밀리는 접전 끝에 몽골 4대 황제인 헌종 몽케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에 몽골 황실은 혼란에 빠졌고, 헌종의 동생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가 다음 제위를 차지하고자 다투었다. 당시 아리크부카는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 쿠빌라이는 전재터에 있었다. 두 세력은 힘겨운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이 중 고려 태자 왕전은 쿠빌라이를 택했고, 이는 훗날 고려에 행운을 가져다 준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리크부카는 1264년 7월 쿠빌라이에게 항복했고 2년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황제가 된 쿠빌라이는 고려에 우호적이었으며 강화는 고려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고려느 원의 직할령으로 복속되지 않고 국명과 풍속을 유지했다.  

 1260년 고려로 돌아온 원종은 11년 뒤 원나라에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고려 태자와 원나라 공주 간에 혼인을 맺자는 것, 원종이 혼인을 제의한 까닭은 원 황실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고려와 몽골 간의 강화를 안정적으로 유지함으로써 국가를 보전하려 했다.

원종의 아들 충렬왕과 쿠빌라이의 딸 제국공주가 혼인하여 그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바로 충선왕이다. 


몽골의 침략을 받은 나라는 멸망하고 그 이름도 사라져버리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고려만은 원나라와 분명한 국경선을 유지하면서 사실상 독자적인 국가로서 지위를 보장받았다. 여기에는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라는 점, 즉 그 왕이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는 나라라는 특수한 관계가 중요한 요인이었다. 


충선왕이 왕위를 이어받았을 당시 충렬왕은 나이 예순으로 목숨이 위태롭지도 건강이 나쁘지도 않았다. 갑작스럽게 왕으로 책봉된 충선왕, 그 배경은 무엇일까?


충선왕은 태어난 지 채 2년이 안 된 1277넌 1월 고려의 세자로 책봉되었다. 원나라는 충렬왕을 제쳐두고 그들과 국제관계를 꾸려갈 고려의 파트너로 세자, 미래의 충선왕을 택하였다. 세자는 그런 원나라를 등에 업고 고려에서 최고 실권자가 된 것이다.


충렬왕은 왜 세자에게 갑자기 밀려났을까?

충렬왕은 원나라의 일본 원정을 적극 도왔다. 직접 개경에서 마산까지 내려와 원정을 독려하며 석 달 동안 머물기도 햇다. 충렬왕이 원나라의 일본 원정을 적극 도운 덕분으로 고려는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충렬왕은 즉위 초부터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해왔다. 원의 강요에 의해 관제를 변경할 때도 원나라의 관제와 일치하는 것만 개정하고 고려의 독자적인 관제는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 고려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 다루가치를 완전히 철수할 것과 군사 기지로 쓰고 있던 탐라를 돌려줄 것, 전쟁 때 잡혀간 고려 백성을 돌려보내 줄 것 등을 요구했다. 원나라 성종은 자칫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정도로 권력을 강화한다면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하여 원나라는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충렬왕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충선왕이 왕위에 머무른 기간은 아주 짧았다. 왕위에 오른 채 불과 8개월 만에 폐위 당했다. 충선왕이 폐위 당할 무렵 고려 조정에서는 조비무고 사건으로 불리는 일대 사건이 터졌다. 충선왕의 정실 부인은 원나라 진왕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사랑한 여인은 고려 여인 조비였다. 그것은 충선왕을 폐위시키기 위한 빌미일뿐이었다. 진짜 이유는 충선왕과 원 황실 간의 힘겨루기에 있었다.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권신이 소유한 광해한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군제와 세제도 정비했다. 더구나 원나라와의 관계에 편승하여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는 자들을 과감히 제거했다. 

충선왕의 새로운 정책 방향도 방향이지만, 무엇보다도 그 정책들이 원나라와 사전 협의 없이 채택되어 실행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시되었다. 




글의 끝에 다음과 같이 쓰여져있다.

쿠빌라이의 외손자로 태어나 왕위에 두 번 오르고 먼 서번 땅으로 유배되고....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군왕이 일찍이 있었던가? 강대한 원나라에 종속되었던 우리 고려의 운명 속에서 상왕이 택할 수 있었던 길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쿠빌라이의 외손이자 고려의 왕이라는 상왕의 태생 자체가 고려가 처한 운명의 축도인 것을, 인걸이 있다한들 시절이 받쳐주지 않으니, 품은 뜻일랑 한 마당 꿈으로 스러질 뿐 !!


지금의 우리 나라 모습과도 유사한 듯 보인다. 미국이라는 강대국과 교류하며 미군이 우리 나라에 주둔하고 있다. 지금은 그래도 예전보다는 왕들의 압박이라는 것은 조금 사라진 듯하다. 내가 모르는 외교적 압박이 있을 수 는 있지만 말이다. 우리 나라는 항상 미국 대통령선거의 판세에 주목한다. 경제도 주가 소식을 귀기울이고, 

강대국과의 외교는 어떤 식으로 해야 정말 실리적일까? 무조건적? 중립적? 외교문제는 정말 어렵다. 나라 대 나라가 하는 것이라 손실이 어마어마하기에 정말 신중 또 신중해야한다. 고려, 대한 민국... 2014년인 지금 어떤 외교를 펼쳐야 이득도 있고 안정한 나라가 될 수 있을까? 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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